“자고로 돈이라는 건, 떳떳하고, 당당하게, 벌어야 하는 거예요.”
할아버지 집을 나와 내 투덜거림은 한동안 계속됐다. 그야말로 죄 없는 아줌마한테. 할아버지를 빗대어 하는 말이다. 숙박비와 밥값을 받을 때가 되자 할아버지가 돌변했다. 지난밤 자식 자랑에 한껏 열을 올리시더니, 오늘 아침에는 그 자식들을 천하에 몹쓸 후레자식으로 만들어버린다.

“에이, 몹쓸 놈들! 아들이 의사고 며느리가 선생이면 뭐해? 노름에 빠져서는 다 늙은 부모 공양할 줄 모르는데. 언제 한 번 용돈 하라고, 땡전 한 푼 준 적이 없어요. 한국은 부자 나라라지? 그러니 아가씨도 부자일 테고, 그렇지?”

그렇게 해서 얼마나 더 받는다고. 내 여행의 산통을 와장창 깨버리시나. 아줌마 뒤꽁무니 따라 가파른 언덕 오르랴, 열변을 토하랴. 하도 구시렁거렸더니 숨이 차다. 잠시 쉬어가려고 멈춰 섰다. 영영 이별한 줄 알았던 진사강의 누런 물줄기가 바로 등 뒤에 있다. 진사강이 햇살에 별처럼 반짝인다. 망망대해처럼 펼쳐진 자연을 바라보노라니 피식 웃음이 새나온다.

‘돈은 정정당당하게 버는 거라며? 그런데 나는 왜 할아버지한테 정정당당하게 항의하지 못했는데? 할아버지 앞에서는 입도 뻥끗하지 않았잖아. 체면을 생각한 거야? 그리고, 애먼 아줌마는 왜 잡나? 진짜 비겁한 사람은 나네, 나야.’

할아버지 댁에서 마지막 장면은 마음에서 탈탈 털어낸다. 싫었던 건 그 한 가지뿐. 사실, 모든 게 좋았다. 모쒀인 전통 가옥 체험도, 외할머니처럼 인자한 할머니도, 그리고 아줌마와 내가 직접 해먹은 저녁식사도. 물론 할아버지도 좋았다. 개구쟁이처럼 익살스러운 농담으로 할아버지는 날 여러 번 배꼽 잡고 웃게 했다. 화장실이 급한 내게 “온 세상이 화장실인데 뭐가 걱정이야? 아무데나 싸!” 했던 것처럼.

한 시간쯤 걷자 언덕바지에 이르렀다. 발아래 대지는 광활하고, 고개 들어 보는 하늘은 웅장하다. 푸르른 하늘이 마치 바다 같다. 그 아래 주름 자글자글한 산봉우리들은 섬 같고. 이곳을 지나면 진사강은 더 이상 볼 수 없다며, 아줌마가 사진 많이 찍어두란다. 3일간 아무 말 없이 내 옆을 지켜준 진사강이 어느새 친구 같다. 헤어지려니 아쉬워 자꾸 뒤를 돌아본다.

트레킹 4일째. 자연을 걷는 것도 이제 하루 남았다. 자연을 오롯이 두 발로 걸어 여행한다는 것은 순간순간 묘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자동차나 기차를 타고 빠르게 이동하는 할 때는 전혀 느끼지 못한 것들이다. 자연에는 사람의 의지와 힘으로 저항할 수 없는 어떤 요소가 존재했다. 그래서 두 발로 땅을 딛고 선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상황을 겸허히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뿐. 예기치 못한 상황을 슬기롭게 벗어나려면 우선 막연한 내 안의 두려움부터 버려야 했다. 두려움을 내려놓으니, 일상에서라면 일단 거부하고 저항했던 난감한 상황에서도 조급하지 않고 겸허해진다. 자연을 밟고 걷는 동안에는 사고가 유연해진다. 그러자 딱딱하게 굳어버린 일상이, 내 삶이, 나 자신이, 이 자연에서는 달리 보인다.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는 태도가 달라진 것이다. 마음이 부드럽고 너그러워진다. 나에 대해서도 한없이 관대해진다. 참으로 신기하다.

산마루에 오르자 거짓말처럼 매점 하나가 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기분이다. 입이 헤벌쭉해진다. 아줌마와 나는 얼른 음료수를 사서는 선 채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음료수 한 병에 마구 행복해지는 경험, 이 역시 걷기여행이 준 선물. 여주인은 이런 우리가 안됐는지, 의자를 내주며 쉬어가란다. “어딜 가는 길이냐?” 그녀의 물음에 “걸어서 루구호에요.” 했다. 길에서 만난 이들이 공통적으로 묻는 질문이고, 99.9% 같은 반응을 보인다. 뭐, 여주인이라고 다르랴.

‘이 아가씨, 정신이 나갔군, 나갔어!’ 하는 표정으로 아줌마와 나를 번갈아 본다. 옆에서 이 이야기를 유심히 듣던 젊은 여인이 내게 깊은 호기심을 표한다. 어디서 왔냐, 혼자 왔냐, 한국에서 비행기 타고 여기까지 얼마나 걸리냐, 그 비행기 값은 얼마냐, 몇 살이냐, 결혼은 했냐 등등. 이렇게 나는, 노천에서 시시때때로 면접을 본다. 그리고 여인의 순박한 반응에 나는 입이 찢어져라 함박웃음이 피었다. 서른넷 이라는 내 나이에 걸맞지 않게 피부가 아기처럼 곱다나. 스무 살인 줄 알았단다. 그래서 내가 “에이 무슨, 결혼 한 지 벌써 8년이 됐다.”고 하자, 모계사회의 모쒀 여인답지 않게 극렬하게 반응한다.

“어머나, 이런 여행을 남편이 허락해요?”
몹시 부러워했다. 그러나 나는 곧 천하에 둘도 없이 불쌍한 여인이 되었다.
“아직까지 애가 없어요? 아이고…….”
“누구에게나 나름의 사정이라는 게 있지요. 세상에 존재하는 인구수만큼, 세상에는 다양한 삶의 방식과 저마다의 인생이 존재하지요.”
멋지게 대답하고 싶지만. 내 중국어 실력으로는 역부족! 근데 이 여인, 심성이 비단결처럼 곱다. 뜬금없이 내 손을 덥석 잡는 거다.
“언젠가, 꼭, 생길 거예요.”
졸지에 나는 드라마 속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어 생면부지의 여인에게 위로를 받았다.

아줌마와 나는 이 여인과 동행하기로 했다. 여인은 며칠 전부터 배가 살살 아파서 2시간 반쯤 떨어진 의원에 가는 길이란다. 혼자 가기 심심했는데 마침 잘 되었다며 아이처럼 좋아한다. 여인은 얼른 아줌마 손에 들린 가방 하나를 챙겨 들었다. 아줌마와 여인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앞서 걷고, 나는 그 뒤를 따랐다. 여기저기 공사판이 이어진다. 한창 도로를 건설 중이다. 눈이 언제 내렸는지, 아니 만년 설산인가. 눈 쌓인 봉우리가 햇살에 반짝인다. 날씨도 차츰 제자리를 찾아가는 모양이다. 뺨을 스치는 바람이 어제와는 사뭇 다르다.

심성 고운 여인과 헤어진 후에도, 아줌마와 나는 말없이 걷기만 한다. 거와(格瓦)촌을 지나자 그동안 여름 같던 땡볕은 온데간데없이 아주 사라졌다. 서늘한 냉기가 가슴을 파고든다. 가방에 아무렇게나 처박아 두었던 점퍼를 꺼내 입었다. 이제 산들은 대부분 내 발아래 있다. 걷기도 점점 수월해진다. 산 아래 골짜기마다 계단식 논밭과 올망졸망한 집들이 모여 있다. 푸른 숲을 이룬 산들이 춤추듯 굽이진 풍경도 아름답지만, 인간이 피땀으로 일군 ‘삶의 터전’이야말로 진정 비경이다. 그 안의 현실은 퍽퍽하고 남루할지라도, 멀리서 바라보면 자연의 품에 안긴 천국 같다. 맞은편에서 책가방을 메고 걸어오는 여자아이가 뜻밖의 인사를 건넨다.

“헬로우!”
‘니하오’가 아니고 ‘헬로우’란다. 이런 무모한(?) 여행을 하는 중국인은 아주 드문 모양이지.
“니하오!”

지나치게 우렁찬 나의 대답에 아이는 뻘쭘해서 귀까지 빨개졌다. 그냥 ‘헬로우’할 걸 그랬나? 고개 너머에 다른 한 고개가 이어지는 다소 밋밋한 길이 반복된다. 길은 어쩜, 우리네 인생을 이리도 빼닮았는지! 반복되는 일상을 맴도는 우리네 삶 같다. 언덕 너머에 더 큰 언덕이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일상에서도 늘, 하나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나면 또 다른 숙제가 기다리지 않나. 지루하게 반복되는 언덕에 올라 마침내 마시는 사이다 한 병. 그 청랑하고 짜릿한 맛은 걸어본 사람이라면 안다. 날마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작은 성취는 일상을 견디게 하는 사이다가 아닐까. 그래서일까? 걸으면서 나는 점점 용감해진다. 이 지난한 길도 언젠가는 끝나기 마련, 그러니까 포기하진 말자, 하고 나를 격려한다. 한 발짝 한 발짝 떼는 걸음마다 나에 대한 믿음도 쌓여간다. 길 위에서 나는 비로소 ‘진짜 인생’을 배운다.

“우리 집에서 이 트레킹 시작한 지 17년 됐거든요. 유행처럼 번진 건 불과 2,3년이고요. 그런데 여자 혼자 이 길을 걷는 건 아이(阿姨, 한국어로 이모)가 처음이에요.”
“인터넷에서 보니까, 젊은 프랑스 아가씨가 저보다 먼저 걸었던 걸요. 나귀 두 마리랑, 마부 아저씨랑. 루구호에서 스토우청까지, 저랑 반대로 걸어서 가던 걸요.”
“아이는 오로지 두 발로 걷고, 그 아가씨는 나귀의 힘을 빌렸잖아요. 의미가 달라요. 그러니까 아이가 처음이에요.”

뭐, 아줌마가 처음이라니 괜히 더 영광스럽다. 아줌마 뿌듯해하는 내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내일 걸을 원시삼림은 정말 힘들어요. 여기서부터 루구호까지 차타고 가는 거 어때요?”
아줌마가 달리 보인다. 마시는 ‘악마의 유혹’보다 더 달콤한 ‘악당의 유혹’이라니. 사탄이 따로 없다. 이거, 흔들리면 안 되는데.